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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칼뱅)의 기독교 강요, 어린시절 우리와 다른가?

by 윤형 2020.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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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는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훌륭한 서적입니다. 출판되기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평가를 받는 이 책의 저자는 존 칼빈(칼뱅)입니다.


 

칼뱅 태어남

 

칼뱅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누아용에서 태어났습니다. 칼뱅의 본래 이름은 장 코뱅입니다. 그는 평생 여러 이름을 사용했는데, 14세 즈음 '칼비누스'라는 라틴어 이름(프랑스어로는 장 코뱅)을 짓고 이름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칼뱅 가족

그의 어머니 '잔느 르 프랑'는 칼뱅은 태어나 세 살이 되던 해 죽었습니다. 아버지 '제라르 꼬뱅'은 본래 하층민이었으나 꾸준한 노력 끝에 시민권을 얻고 당시 교회의 서기 일을 보았습니다. 칼뱅이 살았던 누아용은 종교적 분위기가 특별히 짙은 도시로서 성당, 교회가 무수히 많아서 "뭐든 말 세 마디를 마치기 전에, 교회 종소리를 한 번은 듣게 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칼뱅의 아버지는 칼뱅을 11살부터 유급 성직자로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칼뱅의 결단

칼뱅이 14세가 되던 1523년에 파리로 가서 신학공부를 했지만, 석사를 마치고 나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오를레앙에 가서 법학 공부를 했습니다. 당시 칼뱅이 남긴 기록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내게 신학 공부를 시키기로 작정하셨다. 하지만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다 부유해지는 것을 보고 갑자기 계획을 변경하셨다." 그의 첫 저작은 1532년에 출간된 <세네카 관용론에 대한 주석>이었는데, 이는 철학적, 인문학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신학적인 의미는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의견을 반영하여 법관으로 일하며 수입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1531년에 아버지가 죽고 난 뒤, 1533년에 법학 공부를 하던 중 "주께서 갑작스레 나의 마음을 돌리셨다.. 다른 공부를 손에서 놓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예전처럼 맹렬히 추구하지는 않았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 중 오를레앙 대학의 헬라어 교수였던 볼마르의 영향이 컸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를 통해 신약성경을 원어로 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영웅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시작했던 일을 칼빈(칼뱅)은 명석한 지성과 쉼 없는 펜으로 계속하여 완성할 것이다. 루터는 로마 교회에서 신교를 때어냈고 종교개혁을 가져왔다. 칼빈은 그것을 확립하고 안정시킬 것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진리들을 종이 위에 담아내고,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가를 해석할 것이다.

 

-테아 반 할세마, [이 사람 존 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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